“위안부 없는 곳 없었다”… 조선인 日군무원의 증언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20-07-27 16:34:22    조회: 1,928회    댓글: 0

 

[사회] 게재 일자 : 2015년 08월 03일(月)
“위안부 없는 곳 없었다”… 조선인 日군무원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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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감시원 송복섭 과거 인터뷰
태평양전쟁희생유족회 영상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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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河野) 담화 발표 22주년(8월 4일)을 하루 앞두고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 군무원으로 일하며 위안부 피해자들을 목격했던 조선인의 생생한 증언 영상이 공개됐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3일 1940년대 초 강제 징용을 피하려 일본군 군무원으로 입대한 뒤 인도네시아에서 포로감시원과 보급병 등으로 일했던 송복섭(1916년생·작고) 씨의 증언 영상 일부를 처음 공개했다.

송 씨는 일본 패망 후 수마트라섬 팔렘방 지역에 꾸려진 자치조직 ‘조선인회’의 감찰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송 씨는 영상에서 “당시 팔렘방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들은 ‘제1명월관’과 ‘제2명월관’ 두 곳에 나뉘어 있었고, 수마트라와 싱가포르 인근에 조선인 위안부가 없는 곳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곳에 간 군인들이 치른 요금은 50전이었고, 문 앞에도 ‘한발(一發)에 50전’이라는 안내문이 있었다고 했다. 송 씨는 명월관 운영자는 한국인으로 위안부를 관리하며 비호를 받는 ‘끄나풀’이었다고 주장했다. 영상에서는 송 씨가 감찰을 위해 작성한 메모 속 위안부 피해자 수십 여 명의 명단이 공개되기도 했다.

송 씨는 1946년 2월 연합군에 체포된 뒤 같은 해 7월 싱가포르에 있는 영국 군사재판소에서 B·C급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송 씨는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됐지만, 자신이 감시했던 영국군 포로 ‘리즈 중령’의 증언으로 가까스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당시 송 씨 외에도 20여 명의 군무원이 있었지만, 이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송 씨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임원희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사무총장은 “이번 영상은 송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유족회에 가입하며 증언한 내용을 청취·녹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평양전쟁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의 생생한 증언을 청취해 온 유족회는 지난 2004년 9월 이후 관련 영상들을 하나둘씩 공개하며 일본 정부의 과거사 반성과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유족회 측은 4일 오전 충남 천안시 ‘망향의 동산’에서 생생한 증언으로 고노 담화를 이끌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낼 예정이다. 고노 담화 발표 전 일본대사관을 통해 강제연행 당시 상황을 증언했던 16명의 위안부 할머니들 가운데 현재 14명이 사망했으며, 이 가운데 10명의 위안부 할머니가 망향의 동산에 안치돼 있다.

김다영 기자 dayoung817@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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